역(逆)서구화 시대. 우리 것으로 회귀하는 코리디자인(Kor-Redesign)

대한민국의 근대화 역사는 곧 서구화의 역사였다

20세기 중엽, 일제의 치하에서 독립한 대한민국은 급격한 변화의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이 시기의 급격한 변화는 종종 ‘근대화(近代化)’라는 이름으로 지칭된다. 근대화의 이름 아래 진행된 우리 사회의 변화 방향은, 이전의 것을 새롭게 창조하는 작업이 아닌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여 우리 실정에 맞게 바꾸는 작업에 가까웠다. 그러는 와중에 우리는 서구화된 문물이 곧 선진 문물이라는 가치관에 사로잡히게 된다. ‘근대화 = 서구화’라는 공식이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게 되면서 서구에서 온 것이 우리가 받아들이고 발전시켜야 할 소중한 가치인 것 마냥 포장되었다. 이러한 가치관이 우리나라가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 선진국에 진입할 수 있게한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다보니 우리 고유의 것에 대한 가치 평가는 뒷전이고 바다 건너 흘러들어온 사상, 문화, 기술의 흡수에 집착하게 되었다.?

 

우리 것의 진정한 가치를 가슴으로 깨닫고 이를 실천한다.
코리디자인(Kor-Redesign)?

그렇게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우리는 서구의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이를 통해 눈부신 경제 발전도 이루어냈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서구화의 부작용으로 인해, 우리 사회는 한민족의 정체성을 조금씩 잃게 되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요소인 의식주에서 우리는 이미 상당 부분 서구의 양식과 문화를 답습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깨닫게 된, 의식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서구화에 대한 부작용을 염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러던 중?과도한 서구화를 경계하는 대신, 우리 것의 가치를 깨닫고 실천하는 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른바 코리디자인(Kor-Redesign)의 등장이다.

I ? ?코리디자인(Kor-Redesign)
서구화의 영향으로 인해 훼손된 우리의 가치를 회복하고자 하는 디자인 조류
활자, 생활, 얼 등의 다양한 측면에서 우리 것의 가치를 재조명

 

코리디자인이 주목하는 세 가지 단면

1.?활자와 서체 (typography)

디자인의 실무적인 측면에서 활자가 차지하는 영향은 상당히 크다. 흔히 타이포그래피(typography)라는 용어로 더 많이 사용되는 활자 및 서체 디자인은 우리 생활 곳곳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손길이 닿는 곳, 눈길이 머무는 곳이라면 모든 곳이 작업 대상이 되는 디자인의 세계에서 활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어림잡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수 십 년 동안 우리의 문자인 한글의 디자인 작업은 다소 정체되어 있었다. 특히 특색있고 고유한 서체의 개발이 활발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는 활자를 전공한 전문 디자이너들이 한글 서체를 이용한 작업보다는 외래 문자인 알파벳을 이용한 서체 작업에 집중한 까닭이 크다. 알파벳을 이용한 서체 작업이 좀 더 다양하고 특색 있는 작업을 하기에 유리하다는 생각이 한동안 사조로 잡으면서 한글을 이용한 활자 및 서체 디자인은 침체되어 있었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신진디자이너들이 한글을 이용하여 새롭게 활자 디자인을 시도하고, 한글을 이용한 활자 디자인의 참다운 아름다움이 부각되면서 점차 한글 이 지닌 활자로서의 위상이 높아지고 있다.

  • 한글을 이용한 활자의 아름다움을 공유하다.?네이버 ‘한글한글 아름답게’ 캠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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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대 포털인 네이버에서는 한글의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한 캠페인을 수 년 째 해오고 있다. ‘한글한글 아름답게’라는 이 캠페인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온라인 최초로 디지타이징(기존의 고문서를 온라인 최적화 형태로 디지털화하여 해석과 함께 데이터 베이스로 구축한 방식)하고 한글 시 공모전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특히 네이버가 직접 제작한 나눔글꼴 등의 한글 서체를 무료로 대중에 공개하여 사용케 함으로써, 한글을 이용한 활자의 아름다움을 대중과 함께 나누는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무료 서체는 완성도가 떨어지고, 쓸만한 서체는 대부분 유료 서체였기 때문에, 이러한 네이버의 글꼴 나눔 켐페인은 대중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코리디자인의 한 형태라 할 수 있다.

  • 한글이 지니는 디자인적 가치를 교육하는 한글타이포그라피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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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디자인의 전반적인 실무와 이론을 가르쳐주는 교육기관이나 학원은 많았다. 하지만 디자인의 기본이 되는 서체와 활자 디자인, 그 중에서도 한글에 대해서 전문적으로 교육하는 기관은 흔치 않았다. 디자인의 메카인 홍대 부근 합정동에 위치한 한글타이포그라피학교는 한글 서체와 활자 디자인에 대해서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사설 교육기관이다. 그동안 시도되지 않았던 한글에 대한 전문 교육을 실시함으로써?한글과 다른 문자들의 차이를 배우고?이들을 섬세하게 다루어 조화롭게 표현하는 방법을 공부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글타이포그라피학교와 같은 전문 교육기관이 한글 서체를 디자인하는 전문가를 육성하고 이들이 자신이 속한 전문 분야에서 활동하게 되면 점차적으로 한글의 서체 디자인 영역이 확장되고, 산출물이 더욱 풍부해지는 선순환 효과를 이루어 낼 수 있다.

2.?전통 기념일

디자인이라고 하면 으레 시각적 산출물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생활 양식의 디자인도 광의의 디자인에 속하는 영역이다. 우리의 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기념일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설계하는 것도 디자인의 영역에 속한다. 특히 요즘 기념일은 수많은 젊은이들이 축제처럼 즐기는 특별한 날이어서 일반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히 크다. 그런데 요즘 젊은 층이 향유하는 기념일 중 적지 않은 수의 기념일이 서구에 그 유래를 두고 있다. 연인 사이의 사랑을 확인하는 발렌타인데이, 할로윈 등이 대표적이다. 문제는 이러한 서구 기념일들로 인해 파생되는 뜻 모를 기념일의 난립이다. 이러한 기념일들은 문화적?근본 없이 젊은 층의 생활 양식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족보도 마련되지 않은 기념일을 전통적인 이야기를 간직한 우리의 기념일로 바꾸는 코리디자인 작업이 필요한 시점이다.

  • 발렌타인데이? No! 칠월칠석절이다!

얼마전 8월 13일은 음력절인 칠월칠석절이었다. 우리에게 친숙한 견우와 직녀가 1년에 한번씩 만나는 날이다. 하지만 어릴적 전래동화에서 칠월칠석을 접할 뿐, 대한민국의 성인들에게 칠월칠석은 그저 지나가는 평범한 하루일 뿐이다. 인터넷 상에서도 칠월칠석을 기념하는 풍경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뜻밖에도 미국이 낳은 최대의 검색사이트인 구글에서 칠월칠석을 기념한 두들(doodle. ?구글이 기념일을 기리기 위해 꾸미는 첫화면 로고)을 내놓아 한동안 국내 네티즌 사이에 화제가 되었다. 국내 포털도 챙기지 않는 칠월칠석을 구글이 챙겼다는 사실이 대단하고 신기했다는 내용이 주였다. 그러나 사실 구글이 칠월칠석 두들을 기획한 것은 국내 사용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중화권(중국, 홍콩, 타이완) 사용자를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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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의 칠월칠석 두들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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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의 칠월칠석 두들(2009년)>

– 아래 지역(Location)을 보면 중국, 홍콩, 타이완만 적혀있을 뿐 한국은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다?

구글은 2009년에도 칠월칠석 두들을 만들어 공개했는데, 관련 홈페이지에 게시된 지역(국가)에 한국은 제외되어 있다. 즉, 올해의 칠월칠석 두들에 한국은 곁가지처럼 포함되었을 뿐이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왜 구글은 중화권 사용자를 위해서 칠월칠석절을 두들로 만들어 기념했을까. 그것은 중국 본토에서 칠월칠석이 발렌타인데이보다도 더 중요한, 연인들을 위한 기념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동양 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기념하는 칠월칠석절의 전통이 중국에서만 남아있을 뿐, 우리나라에서는 명맥도 남아있지 않다. 예로부터 이어져온 전통적인 기념일 중 법정 공휴일로 지정된 추석과 설날을 제외한 전통 기념일(칠월칠석, 단오절 등)은 이제 점점 우리에게서 멀어져가고 있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대대로 전해내려온 이야기(storytelling)를 담은 전통 기념일을 되살리는 일, 그것이야말로 생활양식을 재창조하는 코리디자인의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3.?얼(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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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언해본>?

“네 언어의 한계는 곧 네 세계의 한계이다. – 철학자 비트겐슈타인”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네 언어의 한계는 곧 네 세계의 한계이다’라고 말했다. 언어를 통해서만 정신적 사고가 가능하기 때문에, 한 사람이 쓰는 언어의 깊이가 그 사람의 정신 세계를 결정짓는다는 의미이다.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는 그 사람의 정신, 즉 얼을 완성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말을 사용함으로써 우리가 지닌 정신적인 가치를 가다듬고, 전통적인 의미를 되새기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은 우리의 얼인 우리말을 지키는 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띄고 있다. 이전에 우리말로 되어 있던 기업이름은 언제부터인가 축약된 알파벳 단어로 바뀌었고, 학계나 업계에서 쓰이는 용어 중 상당수가 외래어로 가득 차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각 지자체들은 경쟁적으로 영어로 된 로고와 슬로건을 가지고 홍보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정부의 각종 공문서, 심지어 국정 기조 문장이나 어젠다마저 외래어로 된 것이 대다수다. 예컨대 이번 박근혜 정부의 대북 정책 기조를 함축한 표현인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영어에 생소한 60대 이상의 어르신들이 곧바로 이해하기 힘들다. 이렇게 우리는 심각한 외래어 공해 속에 살고 있으나 일반인들은 그 심각성을 잘 알지 못한다. 외래어의 남용으로 인한 언어의 단절은 곧바로 관계의 단절, 소통의 단절로 이어진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우리 말로 된 용어와 어휘로 이전의 잘못을 대체하는 일.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얼을 지키고 계승하는 코리디자인의 중요한 역할이다.?

 

우리 것을 지키기 위한 노력. 하지만 영혼 없는 외침은 메아리에 불과하다

서구화의 부작용이 가져온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것일까. 너도나도 전통적인 것보다는 외국의 것, 특히 서구적인 것을 찾다보니 이에 대한 잘못을 인식하고 우리 것의 가치를 새롭게 재조명하자는 움직임은 수시로 있어 왔다. 외국에서 건너 온 사상이나 문물을 멀리하고 우리 것을 아끼고 사랑하자는 ‘신토불이’ 운동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신토불이 운동은, IMF사태로 인해 외산을 배격하는 단순 경제 논리에 편승하여 우리 것에 대한 제대로 된 가치관을 심어주는 데에는 실패했다.

또한 신토불이와 비슷하게 내세워진 구호가 바로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문장이다. 아마 이 문장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구호이다. 해외에 진출하여 성공을 거둔 한국인이나 한국 제품 등을 예로 들며 한국적인 것에 대한 가치를 설파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단골 문장이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해서, 쿠바 사람이 세계 무대에 대고 ‘가장 쿠바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라고 이야기한다면 그걸 받아들일 한국인이 얼마나 있을까. 지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전 세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공통의 가치를 포함해야 하는데, 무조건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모순적인 구호를 들이대니 가슴에 와닿을리 만무하다. 우리 것으로 새롭게 구성하는 코리디자인 작업은 큰 것을 이루어보겠다는 욕심에 근본을 잊어버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코리디자인, 지역주의와 세계화의 경계에서 중심을 잡으라

통신과 교통 기술의 발달로 세계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이제는 전 세계를 하나의 마을로 여기는 ‘지구촌’이라는 단어가 어색하지 않은 시대가 도래했다. 세계화의 커다란 흐름 속에서 끝까지 자신의 문화만을 고수한다면 경쟁에서 뒤쳐질 뿐만 아니라 그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게 되는 잘못을 범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논리 때문에 지역주의는 종종 나쁜 것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지역주의는 전통적 가치와 결합하여 충분히 좋은 방향으로 설계(design)될 수 있다. 오히려 세계화의 이론을 맹신하여 무조건적으로 외래 사상이나 문물을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여 자기것으로 만드는 시도는 지역과 문화의 정체성 근간을 흔들게 될 수 있다. 앞으로 우리의 디자인은 지역주의와 세계화의 경계에서 중심을 잡고 유연하게 앞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디자인을 통해 대한민국의 가치관을 바로잡고 전통적 가치를 되살리는 일. 디자인은 물론, 그 이상의 영역에서 코리디자인의 역할이 주목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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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원

김희원

최신 ICT 산업 트렌드에 큰 관심을, Mega Trend로 발전할 Micro Trend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분야와 경계를 넘나드는 융합을 통해 트렌드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제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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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오

    코리디자인(Kor-Redesign) 이라는 말은 어디서부터 나오기 시작한 것인지 궁금하네요.

    “외래어의 남용으로 인한 언어의 단절은 곧바로 관계의 단절, 소통의 단절로 이어진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우리 말로 된 용어와 어휘로 이전의 잘못을 대체하는 일.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얼을 지키고 계승하는 코리디자인의 중요한 역할이다.”
    ‘코리디자인’이라는 용어 자체가 3.얼에서 주장하시는 바와 너무 이질적으로 떨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 Heewon Kim

      안녕하세요. 위 칼럼을 작성한 에디터입니다. 말씀해주신 것처럼 우리 것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이것으로 회귀하는 디자인 조류의 이름을 짓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는데요. 사실 가장 좋은 방법은 순 우리말로 된 이름을 짓는 것이지만 이미 ‘디자인’이라는 용어가 버스나 택시처럼 대체 불가능한 외래어로 쓰이면서 순 우리말로 된 이름을 짓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굳이 코리디자인이냐, 라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드는데요. ‘우리 것(한국) + 회귀(다시 혹은 재) + 디자인’의 세 가지 의미를 함축하는 자연스러우면서도 간결한 용어를 고려하였지만 의미를 살리자니 길이가 길어져 용어로서 간결함이 떨어지고, 간결함을 살리자니 의미가 통하기 적절하게 통하지 못했습니다. 부득불 ‘코리디자인’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사용했습니다만, 에디터로서 아쉬움이 남는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결론 부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한국의 가치를 되살리는 이러한 디자인 조류가 지역주의와 세계화의 파도 속에서 중심을 잡아야한다고 생각했을 때, ‘Kor-redesign’이 우리나라 외의 지역에서도 충분히 의미를 가졌으면 하는 에디터의 바람이 반영되었음을 고려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희 트렌드 인사이트의 글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져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독자 분들의 열린 조언을 귀담아 더욱 발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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