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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에 담긴 추억을 사랑하는 메모리테크족

산업혁명은 물론 인류사에서 지금까지 기술은 사람들의 삶에 양적인 윤택함을 가져다줬다. 덕분에 우리는 더 이상 주판알을 튕기면서 계산할 필요없이 컴퓨터 키보드를 몇 번 두드리면 수십, 수백자리 연산 결과를 쉽게 받아볼 수 있다. 복잡하고 많은 시간을 투자할 필요가 없어지면서 우리의 삶은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이런 변화의 속도는 최근 AR, VR, 3D 프린팅과 같은 기술들이 등장하면서 가속화됐다. 사람들은 기술로 더욱 빨라지는 사회를 보고 4차 혁명이라 부른다. 하지만 4차 혁명이 가져올 양적인 효율이 우리 삶의 질을 나아가 궁극적인 가치인 행복을 보장한다고 할 수 있을까?

완도, 전남, 전주

cittaslow, http://www.cittaslow.kr/kor/sub01_01_01.php

이 지역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이들은 바로 한국의 ‘슬로시티’들이다. 슬로시티는 1999년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도시운동이다. 현재는 세계 여러 지자체들이 모여 국제슬로시티연맹이라는 국제단체로 운영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염원하며 고유의 라이프스타일을 알리자는 취지로 시작됐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슬로시티의 라이프스타일에 선입견을 갖고 있다. 슬로시티의 라이프스타일은 기술의 발전이 이뤄낸 효율적인 삶의 속도를 느린 삶으로 대체하는 라이프스타일이 아니다. 빠름과 느림, 디지털과 아날로그처럼 한 쪽으로 치우친 삶이 아닌, 양자를 조화롭게 결합한 라이프스타일을 뜻한다. 최근 슬로시티처럼 디지털에 아날로그를 결합한 기술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들이 바로 메모리테크족이다.


메모리테크족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적절한 균형에 있는 기술을 원하며, 그 중에서도 기술로 구현된 추억에 열광하는 사람들


부모-아이의 추억 연결고리인 동화를 풍요롭게 해주는 독일 노드수드 출판사 동화책 프로젝트

독일 노드수드 출판사의 동화책 프로젝트는 2017년 칸 국제광고제 수상작 중 하나로, 음성인식 기술에 아날로그 감성을 결합한 아이디어다. 대개 음성인식이라 하면 우리는 줄곧 인공지능 스피커를 떠올린다. 인공지능 스피커는 집에서 형광등을 끄거나, 쇼핑처럼 허드렛일을 대신한다. 하지만 이 동화책 프로젝트는 다르다. 영상에서 보듯이 부모가 동화책을 읽어주면 인공지능 스피커가 이를 인식하여 읽고 있는 부분에 알맞은 배경음악이나 효과음을 들려준다.

이 동화책 프로젝트에서 주목할 점은 결코 인공지능 스피커가 엄마를 대신해 아이에게 동화를 읽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과거부터 동화책 읽어주기는 아이와 엄마의 애착관계를 형성하는 데 좋은 수단이었다. 그렇기에 직접 읽어주는 기술 대신 엄마의 동화책 읽기를 도우면서, 기술은 엄마와 아이의 애착관계 형성을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 즉, 사람을 추억 속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돌아가신 분의 손길을 추억하는 메시지, 스팟메세지

일본 양심석재

스팟메세지는 묘석과 석재를 판매하는 일본기업 양심석재(良心石材)가 만든 앱이다. 이 앱은 사용자가 먼저 장소를 지정하고, 지정한 장소에서 보여주고 싶은 사진이나 동영상을 저장한다. 이후 해당 장소에 가까이 가면 저장해놓은 사진 또는 영상을 보여주는 앱이다. 이 앱을 활용한다면 고인의 살아생전 모습을 추억이 담긴 장소에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이들은 스팟메세지를 통해 영원토록 추억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앱은 다른 기술과 다르게 최종목적이 생산성이 아니다. 시간이나 돈을 다루는 게 아니라, 추억을 다루는 서비스이기 때문이다. 시간이나 돈처럼 비용적 혜택을 가져다주는 기술은 진일보한 기술이 나오면 대체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처럼 인간관계 속 추억을 돕는 기술은 그 사람이 죽더라도 남은 사람들이 이어가는 영속적인 특징을 갖는다.

반드시 새로운 기술이 아니어도 된다, 나와 LED의 10년

나와 LED의 10년은 일본 전자업체인 도시바가 7년 전 내놓은 광고로, 독일 노드수드 출판사의 사례처럼 칸 국제광고제에서 입상한 광고다. 도시바가 이 광고에서 주목한 것은 ‘오래간다’는 LED의 속성과 ‘추억’이라는 아날로그적 소재다. 추억은 반드시 살 떨리는 짜릿함의 기억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다. 묵묵히 옆을 지켜주기만 하더라도 그 세월이 하나의 추억이 될 수 있다. 도시바는 오래가는 LED전구를 추억의 동반자로 인식시켰다. 이 광고는 메모리테크족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나와 LED의 10년은 메모리테크족의 확장성을 보여준 사례다. 동화책 앱이나 스팟메세지의 경우,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기술을 아날로그에 접목시켰다. 반면 이 광고의 주소재인 전구는 완전히 새로운 소재가 아니다. LED를 통해 제품수명이 더 길어졌을 뿐이다. 즉, 도시바의 접근방식은 새로운 자극이 아닌 잔잔한 자극이다. 이처럼 메모리테크족은 세상에 듣도 보도 못한 기술로 추억을 만들어주길 바라지 않는다. 단지 추억 속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기술을 원할 뿐이다.

메모리테크족 공략법, 새로운 기술보다는 잔잔한 추억으로 감성을 자극하는 것이 핵심이다

지금까지 3가지 메모리테크족 사례를 살펴보았다. 3가지 사례의 시사점은 굳이 특이한 신기술이 아니더라도 추억 속에서 우리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적용해 볼 수 있을까?

pixabay

먼저 어떤 기술을 사용할 지보다 우리 삶에서 어떤 추억을 자극할 지 결정해야 한다. 기술은 추억을 돋보이게 하는 장식품 중 하나일 뿐이다. 따라서 추억을 결정하고 그 추억을 자극할만한 포인트를 찾아야 한다. 위 세 가지 사례에서도 살펴보았지만 메모리테크족은 많은 자극 포인트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단 하나의 진정성 있는 포인트를 원한다. 예를 들어 필자의 아버지는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약 10년 동안은 술에 취하시면 결혼식 녹화 비디오를 틀어보셨다. 그 당시에도 이미 10년도 더 된 비디오였지만, 할머니의 모습을 생생히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과거 추억을 담은 비디오를 VR로 구현해도 메모리테크족에게 좋은 서비스가 될 것이다.

메모리테크족에게 추억 속에서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추억이 되는 과거는 다른 사람과의 만남과 소통이다. 따라서 메모리테크족을 위한 서비스라면 기술이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된다. 만약 독일 노드수드 출판사가 기술이 주인공이 되는 앱을 기획했다면 AI 스피커는 음성인식을 통해 그에 맞는 배경음을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 대신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앱이라면 어느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 진부한 기술이 되어 버렸을 것이다. 즉 신기술이기보다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그들의 추억을 빛내주는 훌륭한 조연이 되어야 한다. 메모리테크족은 결코 기술로 얻는 디지털 혁명을 원하지 않는다.

새로운 기술이 양적인 효율을 만들어낼수록 사람의 역할은 그만큼 줄어든다. 앞으로 사람-사람의 만남과 소통은 점차 줄어들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공존을 원하는 메모리테크족은 더 늘어날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 등장할 메모리테크족을 위한 독창적인 서비스와 제품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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