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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의 세계] 학위 없는 전문가, 정상과 이상 그 사이

며칠 전 한 지인분으로부터 개발자를 소개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제가 IT 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어 주변에 개발자가 꽤 있었기 때문이죠. 저는 그래서 웹, iOS, 안드로이드 등 어떤 쪽의 개발자를 필요로 하는지 물었는데, 그분은 개발자가 그렇게 세세하게 나뉘는 줄 몰랐다며 깜짝 놀라셨습니다.

우리의 직업은 늘 세분화되고 있습니다. 위의 사례처럼, 오히려 예전엔 프로그래머라는 직업 자체가 없었죠. PC가 보급됨에 따라 프로그래머라는 직업이 생겨났고, 다양한 서비스가 나오면서 하나의 직업 안에서 또 다른 직업들이 계속해서 파생되었습니다. “아니 이런 직업도 있다고?” 생각이 드는 직업도 수없이 많습니다. 와인 소믈리에가 아닌 밥맛을 책임지는 밥 소믈리에부터 최고의 떡볶이 맛을 찾아 떠난 떡볶이 연구원까지. 새로운 분야는 끊임없이 생겨나고, 그 안에서 전문가는 계속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까지.

라이프스타일에 맞춘 새로운 전문가

한때는 화려한 디자인이 우리의 삶을 지배했습니다. 더 많은 디테일이 아름다움의 기준이 되기도 했죠. 그러나 확실히 이제는 미니멀리즘이 대세입니다. 반드시 필요한 요소만 담아 기능성을 강조한 북유럽 디자인은 이케아가 한국에 상륙하면서 우리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으나 모든 것이 있다는 무인양품의 인기 또한 사그러 들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 미니멀리즘은 트렌드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가 되었습니다.

미니멀리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정리’입니다. 그리고 이 정리라는 키워드에 깃발 꼽고 가장 먼저 전문가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정리 컨설턴트인 곤도 마리에(Marie Kondo). 세계 모두가 그녀의 정리 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열광합니다. 특히 Netflix의 Tidying Up 다큐를 통해 그녀는 정리 전문가로의 위치를 확실하게 정립하게 되었죠. 그녀가 단순히 정리만 잘 했다면 전문가라고 불릴 수 있었을까요? 그녀의 정리 철학은 삶에 대한 태도입니다. 물건을 버리는 일을 통해 사람들이 Compact Life를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라이프 컨설턴트인 것이죠. 비움이라는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작은 부분을 통해 더 나은 삶을 만들어주는, 라이프에 영향을 끼치는 사람입니다. 

곤도 마리에 Netflix – Tidying Up

연필을 쥐어본 기억이 언제적인지 가끔 잊어버릴 때도 있습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저는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으니까요. 모든 것들이 디지털화됨에 따라 오히려 아날로그 감성이 더 특별해졌고 그 사이에서 ‘문구’가 더 세련된 오브제로 급부상하게 되었습니다. 최근 다양한 편집샵에서 고급스럽고 멋스러운 문구를 취급하고 있고, 뜬다는 라이프스타일숍에 가면 꼭 한 켠에는 스테이셔너리 코너가 위치합니다. 성수동의 포인트오브뷰, 연남동 흑심, 오브젝트 등의 문구 편집샵에서 소소한 문구의 감성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위의 문구 편집샵에 한 권씩 꼭 소개되어 있는 책이 있습니다. 바로 데이비드 리스의 ‘연필 깎이의 정석‘. 아니 연필을 깎는 데에도 정도가 있다니. 처음에는 이 책이 가벼운 내용일 줄 알았지만 실제 책을 읽어 내려가보면, 내용은 꽤나 진지하고, 또 전문적입니다. 연필을 깎기 위해 몸을 푸는 내용부터, 어떤 칼과 방법으로 연필을 깎아야 하는지 나와 있습니다. 실제로 데이비드 리스는 요청하는 사람마다 그 사람에 맞는 방법으로 연필을 깎아주고 약 4만 원의 비용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진짜 연필깎이 전문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데이비드 리스를 통해 연필과 같이 작은 것들에 대한 가치를 다시 한번 환기하게 되기도, 혹은 연필 깎는 행위를 통해 어수선한 마음을 가라앉히기도 합니다.

데이비드 리스 – 연필 깎이의 정석

덕후가 전문가가 되다 

오타쿠 경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덕후가 한 산업에 끼치는 영향력은 상상 그 이상입니다. 덕후가 트렌드를 이끌어 나가는 전문가 대접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요즘의 덕후는 집에만 틀어박혀 있지 않고, 내가 하는 덕질을 계속해서 외부에 알립니다. 그 결과가 새로운 상품 개발로 이어지기도 하고, 브랜드에게 있어 굉장히 중요한 타겟 고객으로 새로운 영향력을 끼치고 있기도 하죠. 

출판 시장에서도 덕후를 위한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생각만 해도 좋은 한 가지에 대한 에세이 시리즈는 어떨까?’라는 생각에서 출발한 ‘아무튼’ 시리즈. 혼란한 가운데서도 중심을 잡고 자기가 좋아하는 뭔가를 하는 삶의 태도를 ‘아무튼’이라고 규정하고, 아무튼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N명의 작가가 아무튼 공유합니다. 양말을 너무 좋아해 88켤레의 양말을 가지고 있다는 구달 작가의 ‘아무튼 양말’을 읽다 보면 그녀의 양말 철학에 빠져들게 됩니다. 양말에 대한 애정이 느껴짐은 물론이거니와 TPO에 따른 양말 추천과 양말에도 계급이 있음을 읽어내려가면서 이해하게 됩니다. 

비건 전문가도 있습니다. ‘아무튼, 비건’을 저술한 김한민 작가는 책을 통해 비건의 논리와 철학을 독자와 공유합니다. 고기를 즐겼던 본인이 어떻게 비건이 되었는지, 나만을 위한 건강이 아니라 건강한 사회를 위해 비건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쉽게 전달합니다. 짤막한 에세이 한 권을 다 읽고 나면 비건에 대한 지식을 전수받는 것뿐만 아니라, 나도 어떠한 행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야말로 덕후가 사람들의 마음 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덕심을 일깨우는 세상입니다. 덕질이 일이 되고, 덕후가 직업이 되고 있습니다. 

<아무튼 시리즈>

어디까지 전문가라고 부를 수 있는거야? 

이제껏 살펴본 바에 의하면 전문가와 장인의 차이는 아래와 같이 정리됩니다.

전문가 : 오래 지속하지 않았어도 남들과 ‘다른’걸 파고드는 사람. 전문가는 계속 생겨난다.
장인 : 새로 생기는 게 아니다. 유지되고, 계승된다.

그러나 전문가가(라고 지칭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전문가라고 정의 내리는 기준이 궁금해지게 됩니다. 가끔 직장인 온라인 수업의 광고로 ‘연봉 2배 올려 이직할 수 있는 마케팅 전문가가 되는 비밀!’과 같은 소재가 나오곤 합니다. 정말 1달 커리큘럼의 온라인 수업으로 마케팅 전문가가 될 수 있는 걸까요? 예전에는 전문가에게 학위를 부여하거나 인증할 수 있는 자격증을 제공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시대에는 특정 학문에만 전문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위의 사례들처럼 전혀 생각치 못한 분야에서 전문가가 나오기도 합니다. 전문가라고 규정할 수 있는 기준이 애매모호해진 것이죠. 

이제까지 다뤘던 내용을 바탕으로 트렌드인사이트에서 정의한 전문가에 대한 기준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문가 =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리고 아래의 세 조건을 충족해야 합니다.


  1. 나만의 아카이브, 가이드가 있는 사람
  2. 나로 인해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있는 사람
  3. 사회적 특정 지위로 나를 소개하는 게 아닌, ㅇㅇ한 사람이라고 소개할 수 있는 사람

사례들을 위의 기준에 대입해보겠습니다.

  • 곤도마리에 : 그녀의 정리는 수단일 뿐이다. 정리를 통해 컴팩트한 라이프를 살아가게 도와준다.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
    • 그녀만의 가이드가 있다 : 정리의 발견
    •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 : 넷플릭스를 통해 수많은 미국 사람들이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싶 한다.
    • 스스로를 ‘정리 컨설턴트’라고 부른다.
  • 데이비드 리스 : 사람들의 연필에 대한 추억을 꺼내주었고, 일종의 사회 트렌드로까지 확장시켰다.
    • 그만의 가이드가 있다 : 연필깎이의 정석
    •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 : 책을 소장한 독자와 웹상에 올라와 있는 수많은 독자 리뷰
    • 스스로를 ‘연필깎이 장인’이라고 부른다.
  • 아무튼 시리즈 : 독자들이 읽고 특정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 나도 이런 작은 분야를 좋아하는데, 나도 작가가 될 수 있을까? → 아무튼 시리즈의 또 다른 에세이 작가가 된다.
    • 그들만의 가이드가 있다 : 하나의 에세이 집으로 그들의 철학이 정리된다.
    •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 : 독자가 곧 작가가 되고, 작가가 곧 독자가 된다.
    • 그들 스스로를 ㅇㅇ덕후라고 부른다.

전문가가 될 수 있는 길이 많아진 이제, 진짜 전문가를 솎아내는 일은 앞으로 더 중요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전문가가 되고 싶은 사람이라면 내가 정말 전문가로의 영향력이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프로의 세계는 진짜 프로만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요.

최 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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